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사변

 

 

1895년 8월 20일 새벽에 일본인들이 건청궁에 침입하여 궁내의 곤녕각 옥호루에서 취침중이던 명성황후를 끌어내어 살해하고 그 시체는 동편 녹원에서 소각하였다. 이를 을미사변 혹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 한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기고만장하여 조선에 대해 심하게 냉정간섭을 하였다. 그러나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이에 자극 받아 민비를 중심으로 민씨 일파가 러시아 세력을 등에 업고 일본세력을 몰아내려 하였다. 그러자 일본측은 이노우에 공사를 무인출신인 미우라로 교체하여 세력만회를 도모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을미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을미사변은 표면상 미우라가 주동이 되고 낭인들이 행동대원으로 가담한 사건이지만, 실제는 일본정주의 음모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의 공동연구한 바에 따르면, 당시의 일본정계 상황으로 미루어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권력의 핵이었던 이노우에가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추천했고 그러부터 비밀보고를 받는등 시해에 깊이 개입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비 시해의 주도자는 이노우에이고 일반적으로 주범으로 알려진 미우라 공사는 행동총책에 불과햇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현직 주한공사엿던 이노우에와 미우라는 시해사건 직전 얼마 동안 서울에 함께 머물면서 임무교대를 했는데 이때 세부계획을 논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또한 일본이 왕비 시해라는 야만적 방법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가 직접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전력을 소진하여, 러시아와 직접 대적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러시아 또한 시베리아철도 건설에 국력을 쏟아붓고 있는 실정이어서 조선문제로 일본과의 충돌을 원치 않았다는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에 동원됐던 일본인들이 보통 "낭인"이나 "깡패"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 또한 책임회피를 위한 일본정부의 조작이라는 해석이다. 시해에 참여했던 일본인들 대부분은 사족출신의 지식인으로 일본에 돌아간 뒤 형식적인 재판을 거채 무혐의로 석방되었으며, 그후 정치적으로도 크게 출세했기 때문이다.

Posted by 서현이네 스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