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story

임오군란

서현이네 스토리 2013. 12. 11. 23:58

임오군란

 

 

 

 

 

1. 임오군란의 배경

개항 이후 민씨 정권은 고식적이나마 어느 정도 개화 정책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민씨 정권은 여러 정치적 반대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들은 잠재적인 정치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대원군 일파와 재야의 위정척사 세력이었다. 거기에 민씨 정권이 극심한 봉건적 수탈과 부정 부패로 민중 또한 민씨 정권을 반대하게 되었다.

이러한와중에서 구식군대와 도시 빈민이 민씨 정권에 대항하여 일으킨 폭동이 바로 임오군란이다.

 

 

 

 

2.임오군란의원인

구식군인들은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창설된 별기군에 비해 엄청난 차별 대우를 받았고, 민씨 정권의 부정부패로 인해 급료조차 제때에 받지 못하고 있었다.

1882년 7월 이들의 급료 지급을 담당하고 있던 선혜청에서는 13개월분이나 밀린 급료중 1개월분만을 겨와 모래가 반 이상 섞인 쌀로 지급하였다. 이에 분노한 군인들은 급료를 받지 않고 책임자를 구타하였다.

그러나 선혜청이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주동자를 잡아들이자, 7월 23일 군인들은 무기고를 파괴하고 일제히 봉기하였다. 이들은 그동안 부정 부패의 온상이었던 선혜청을 습격하고, 그 책임자인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질렀다.

또한 별기군 부대로 쳐들어가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를 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을 포위, 폐쇄시켰다. 다음날은 창덕궁으로 쳐들어가 민겸호, 김보현을 살해하였다.

 

 

이에 당황한 민비는 궁궐을 떠나 충주로 피신하였으며, 일본 공사도 제물포로 도주하였다.

군인들의 봉기에는 외래 자본주의의 침입과 민씨 일파의 부정 부패로 고통받고 있던 서울 변두리의 빈민들도 합세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집권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고종은 대원군에게 다시 정권을 넘겨주어, 군란의 수습을 맡기지 않을 수없었다.

대원군이 정권을 다시 잡자 그들은 해산하고 말았다. 대원군은 정권을 장악한 뒤 민비의 국상을 선포하고, 민씨 정권이 추진해오던 개화 정책을 일거에 폐기하였으며, 개화 정책에 반대하다가 유배당한 위정척사파들을 석방하여 요직에 앉혔다.

별기군은 폐지되고 군여이 부활되었으며, 통무리기무아문도 폐지되고 의정부가 기능을 되찾았다.

또한 대원군은 일본의 계속되는 침략적 책동에 강경하게 맞섰다. 군인들의 봉기에 의해 도주했던 일본은 대원군이 재등장한 후 하나부사 공사를 다시 보내어 일본측 피해에 대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군대 주둔권을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대원군의 강경 자세에 밀려 일단 물러났다.

대원군의 재집권으로폭동은 수숩되었지만, 군란 이후 조선을 둘러싼 외교 관계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3. 임오군란의 결과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청은 군란 당시 청에 머무르고 있던 영선사 김윤식과 어윤중의 요청으로 조선에 3천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대원군을 체포하여 청으로 납치하였다.

그리고 왕십리, 이태원등지를 습격하여 군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써 대권군 정권은 다시 민씨 정권이 들어섰다.

한편, 군란 중에 공사관을 피습당한 일본측은 조선 정부의 사죄와 일본인 거류민 보호를 위해, 일본 군대가 서울에 주둔할 수 있도록 조선 정부에 요구하여 제물포 조약을 맺었다. 민씨 정권이 다시 들어서는데 결정적 열할을 한 청은 이후 계속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이어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통하여 청이 조선의 종주국임을 인정하게 하는 한편, 조선의 내정에 일일이 간섭하여 실질적인 종주국 행세를 하려 들었다.

결국, 1882년 군인의 폭동은 외래 자본주의의 침입과 민씨정권의 봉건적 수탈에 반대한 민중 봉기였다.

이 봉기는 사대주의적인 민씨 일파가 청을 개입시킴으로써 임오군란은 실패로 끝나고말았지만, 민중의 반침략 반봉건 투쟁으로서는 큰 의미를 갖는 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