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무라비 법전의 반포
함무라비 법전의 반포
바빌로니아 문명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는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 고대 서아시아 법률 제도의 발전과 국가 기틀의 확립을 상징한다. 또 향후 서아시아와 서방 국가의 법률, 문화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함무라비 법전 비석 : 검은색 현무암으로 만든 이 비석은 상단에 제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부조가 새겨져 있고, 하단에는 설형 문자로법전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티그리스, 유브라테스 강 유역에는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역법이 존재했으며 세계 최초의 법전으로 알려진 [우르-남무 법전(Code of Nammu)]이 제정되었다.
수메르 시대에 이르러 계급 모순이 격화되자 통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법치를 실시했다. 기원전 2,000년경 자신들의 국가를 건립한 바빌로니아인들은 수메르 문명을 바탕으로 그들만의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바빌로니아 최고의 제왕으로 꼽히는 함무라비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통일하고 노예제 경제를 발전시켰다. 이때 바빌로니아 문명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 했으며 법전 편찬도 가장 활발하게 진행 되었다.
[바빌로니아 법전]은 사법 제도 세속화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1901년에 프랑스 고고학 연구팀이 이집트에서 "함무라비 법전 비석"을 발견했다. 검은 현무암으로 만든 이 비석은 상단에 제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부조가 색져 있고 하단에는 설형 문자로 법전의 내용이 소개 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세계 최초의 법전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법전으로 평가 받는다. 법전의 내용을 통해 고대 바벨로니아사회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법률은 노예를 소유한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보호하는 일종의 수단이었으며, 왕권이 신권과 결합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매개였다. 법전 전문은 설형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서문, 본문, 결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서문에서는 유려한 문체로 함무라비 왕에 대해 소개하며 신화적 색채가 다분하다. 총282조의 조문으로 이뤄진 본문에서는 소송 절차, 손해배상, 소작 관계, 강도 행위 처벌, 임차, 대차, 상속, 혼인, 노예 처벌등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사회 계층은 신분에 따라 시민권이 있는 자유인 노예주와 시민권이 없는 자유인 생산자, 그리고 노예의 세등급으로 구분했다. 법제는 노예주 귀족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전제 아래 자유인들의 원활한 소통을 촉진하여 통치 체계를 공고히 하는데 그목적이 있었다.
고대 바벨탑(Tower of babel) 높이는 90m이며, 정상에 신전이 세워져 있다.
성경에 바빌로니아인들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하늘로 통하는 탑"에 해당한다.
이 법전에는 고대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한 대목도 보인다. 다시 말해, 대등한 신분 사이에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과 같은 원칙을 적용하도록 한 것이다. 채무를 상환하지 못해 노예로 전락한 자는 3년이 지난후 다시 자유인의 신분으로 복원하도록 한 조항은 법전의 관용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결문에는 서문에 이어 함무라비 왕에 대한 소개가 이어지는데, 함무라비 왕의 공적을 칭송하는 내용 외에 법전의 권위와 항구성을 강조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국왕이 말이 아닌 법률 조문으로 백성을 통제한 방식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으며, 특히 바빌로니아 시대 이전에 법률적 구속력이 있었던 전통들을 법조문으로 보존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바빌로니아의 사회, 경제 상황을 그대로 엿볼 수 잇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또 고대 서아시아 법률 제도이 발전과 국가 기틀의 확립을 상징하며 향후 서아시아와 서방국가의 법률, 문화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문명이 단절되면서 [함무라비 법전]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함무라비 법전]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